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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속의 인물.

전경속의 인물

김갑칠(金甲七)
■제자의 생애
본명 용회(龍會)
본관 안동(安東)
부(父) 김기윤(奇允)과 모(母) 황씨(黃氏)의 4형제 중 차남
농업
신사(辛巳 : 1881)년 2월 7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에서 출생. 임오(壬午 : 1942)년 10월 15일 청도리(청도리) 자택에서 62세로 작고. 김준상 제자와 형제간이며 김형렬 제자와 사촌간이다.
■입도(入道)
임인(壬寅 : 1902)년 4월, 22세.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김형렬 제자의 인도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천지공사시 상제님의 일등 수행 비서였으며 많은 공사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수종을 들었다. 특히 상제님께서 외처에 출행하실 때에 괴나리봇짐에 담뱃대 및 기타 행장을 수습하여 모시고 따라 다녔으며 어천 하실 때에도 행장을 챙겼다.
■생애
부인 이씨(李氏)와의 사이에 아들 태일(泰一)을 두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고 수염은 얼마 나지 않은 용모였고 다혈질의 성격이었다. 상제님 어천 이후에 다른 제자들의 교단에 관여하지 않았다.

김경학 (金京學)
■제자의 생애
본명 연상(演相), 경학(京學)은 도명(道名)
본관 김해(金海)
부(父) 김형태(金瀅兌)와 모(母) 김씨(金氏)의 사이의 넷째 아들
고종 때 왕실의 감역관(監役官), 후일 서당 훈장을 함.
신유(辛酉 : 1861)년 8월 4일 전라북도 정읍군 옹동면 오성리(井邑郡 泰仁面 五成里)에서 출생. 정해(丁亥 : 1937)년 8월 15일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井邑郡 泰仁面 泰興里)에서 84세로 작고.
■입도
정미(丁未 : 1907)년 4월. 47세.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井邑郡 泰仁面).
상제님께서 태인 광왕묘 제원 신경원의 집에 머무르실 때 최덕겸, 최창조 등화 함께 상제님을 추종하였다.
김경학 제자는 일찍이 시천주 수련을 하던 중에 천상에 올라가서 천상보좌의 상제님을 알현하였다.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상제님께서 후천 대학교 총장으로 임명하시고 대학교도수를 붙이셨다. 상제님께서 차경석에게는 병부(兵部), 김경학에게 이부(吏部)가 마땅하다고 하셨다.
■생애
양반 가문 출신으로 부친은 진사를 지냈으며 넉넉한 집안살림(태인에서 손꼽히는 지역유지 였다). 덕에 학문에 열중하여 성장 후에는 지역 최고의 유지로 살았다. 6척의 키에 얼굴을 길면서도 하관이 넓고 둥글둥글했으며 점잖고 원만한 성품을 지녔다. 왕실의 감역관을 사직한 후 태인 백암리로 이거하여 훈장을 하던 중 47세의 나이에 상제님과 인연을 맺게 되어 천지공사에 참여하였고, 상제님 천지공사에 물심양면으로 적극 수종 들었다.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 경술(庚戌 : 40, 1910)년 5월에 돌아가신 노모를 태을주로 살리면서부터 태을주 포교의 기원을 열었다. 태인면 소재지로 이거 하여 84세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자택에서 신앙을 하며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제님의 진리말씀을 전하였고, 치성절이면 자신의 재산으로 많은 재물을 준비하여 정성껏 치성을 올렸다. 이로 인하여 작고할 때는 거의 한푼의 재산도 후손에게 남기지 않았다. 이 때 전국에서 70~80명 정도의 신도가 참여하였으나 특별히 교단 조직으로 운영한 것은 아니었다. 부인 은상신(殷相信)과의 사이에 장남인 대곤(大坤)을 비롯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인 대곤(大坤)이 함께 상제님 신앙을 하였다.

김광찬(金光贊)
■제자의 생애
본명 준남(俊湳), 족보명 영락(榮樂), 도명 광찬(光贊)
본관 김해(金海)
부(父) 김진회(金鎭會)와 모(母) 조씨(趙氏)의 장남(양자)
전라북도 임피군 함열현(咸悅縣) 아전(衙前)을 거쳐 전라북도 익상군 황등면장(黃登面長)을 지냄
기사(己巳: 前 2, 1869)년 12월 24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長水郡 番岩面)에서 출생. 정사(丁巳 : 道紀 47,1917)년 5월 27일,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에서 49세에 일제의 탄압으로 순교(殉敎). (묘지, 사망 장소 미상)
■입도
을사(乙巳 : 35, 1905)년 봄, 37세, 전라북도 임피군 함열현(咸悅縣)
김보경의 천거, 함열현 내의 인근 지역에 거주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을사년에 입도한 이래 상제님의 문명을 많이 받아썼다.
상제님께서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평하심.
■생애
생가인 남원군 번암면에서 살다가 16세에 임피군, 함열현, 지금의 익산군 함라면(咸羅面)의 먼 친칙 집안에 양자로 입양되었다. 양부인 진회(鎭會) 씨는 김광찬 제자를 엄하게 가르쳐 잘못을 저지르면 상투를 품게 하고 긴 담뱃대로 매질을 하며 키웠다고 한다. 불고가사(不顧家事)하며 상제님을 때를 때는 아버지가 아예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김광찬 제자가 울타리 사이로 몰래 숨어 들어오면 어머니와 부인이 장독대 뒤로 밥을 숨겨서 들고 나가시게 했다고 한다. 1905년에 김보경 제자의 천거로 천지공사에 참여한 이래 상제님의 문명(文命)을 많이 받아 기록하였고 외출 시에도 자주 수종을 들었다. 상제님께서 '출장입상(出將入相) 김광찬'이라고 평하신 반면, '광찬이 재질은 좋으나 심기가 평순치 못하므로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르리라.'고 하셨다. 눈매가 날카롭고 성격이 거칠고 급하였으며 한 번 들은 이야기는 모두 기억할 정도로 기억력이 비상했다. 야망이 크고 급한 성격을 이기지 못하여 상제님을 따른 뒤에도 간혹 독단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고 상제님께 자주 개벽이 늦게 옴을 불평하였다. 상제님 어천 후에 많은 방황을 하다가 정읍에서 차경석 제자와 함께 활동을 하기도 했으나 후에 남원으로 내려가 '도원리파' 교단을 창립, 조카인 김병선 제자와 포교활동을 하던 중 일제의 탄압으로 순교하였다. 권(權)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1남(東珉) 2녀를 두었다.

김병욱(金秉旭)
■제자의 생애
본명 희근(熙根)
본관 김해(金海)
부(父) 김학수(김학수)와 모(母) 김씨(金氏)의 장남[長男 : 독자(獨子), 양자(養子)]
무관(武官 : 전주부 육군 장교)
갑술(甲戌 : 4, 1874)년 2월 19일 출생. 무인(戊寅)년 6월 13일, 전주시 동서학동 남고산(東捿鶴洞 南固山)의 자택에서 65세에 작고.
■입도
계묘(癸卯 : 33, 1903)년 3월 30세, 전라도 전주부(全羅北道 全州府).
상제님의 성예(聲譽)를 듣고, 서원규 제자, 김윤찬 제자와 같은 시기에 입도.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전주부호 백남신 제자 천거, 전주부 육군장교로서, 당시의 국제정세에 관한 밝은 견해를 표명하여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취하여 쓰실 수 있도록 공헌 했다.
■생애
생부(生父) 김연수(金璉秀)와 모친 문(文)씨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인 학수(學秀)에게 후손이 없어 장자(長子)인 김병욱 제자가 양자로 입양되었다. 대대로 손이 귀한 집안이라 김병욱 제자가 결혼한 후로 관운장을 모시고 철마다 공물을 바치고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무술(戊戌 : 28, 1898)년 함경북도 관찰부 주사(觀察府 主事)로 집안 대대로 이어오던 당시의 중인 계층인 무관의 길을 시작했다. 전주부 육군 3연대 2대대 참위(參慰 : 계급 명칭으로 현재의 소위에 상당)로 3등군사향관(三等軍司餉官)을 지낼 때인 계묘(癸卯 : 33, 1903)년에 부중(府中) 서원규의 약방에 오신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다. 그 해 봄에 상제님께 백남신 제자를 천거하여 대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수종을 들었고 여름에는 향관(향관 : 名 鎭衛大隊에 1인씩 배속되어 경리 전반을 관장한 회계관, 영관 내지 위관급)으로 남원으로 파견되어 일을 할 때 조정에서 친일파로 지목하여 수배를 받던 중 상제님의 구원으로 무사히 끌러졌다. 이 때 상제님께서는 김병욱 제자의 난을 끄르기 위하여 러일 전쟁을 붙여서 일본이 승리하여 패권을 잡게 하시고 또 동서양 세력 균평을 고르기 위해 김병욱 제자의 의견을 크게 쓰셨다. 전주부의 관직에 있었으므로 신앙생활의 범위는 부중(府中)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백남신 제자는 전주 육군진위대 상관이며 조카딸(김병욱 제자 동생의 막내딸)을 백남신 제자 막내동생(백남혁)에게 출가시켰다. 동생인 희병(熙丙)씨는 딸만 넷을 두고 형보다 먼저 사망하여 김병욱 제자의 외아들(奎泰)이 양자처럼 대신 상주를 했다. 그런 식으로 두 집이 하나가 되어 큰집, 작은집 할 것 없이 서로 친형제처럼 지냈다.

김보경(金甫京)
■제자의 생애
본명 영준(榮駿), 자 주팔(周八), 호 농호(聾湖)
본관 안동(安東)
부(父) 김기원(金基源)과 모(母) 서씨(徐氏)의 장남
감역관(監役官)
신유(辛酉 : 前 10, 1861)년 9월 21일, 전라북도 익산군 성당면 대선리(益山郡, 聖堂面 大仙里)에서 출생. 갑술(甲戌 : 64, 1934)년 9월 5일, 전라북도 익산군 성당면 대선리(益山郡 聖堂面 大仙里)에서 74세로 작고.
■입도
임인(壬寅 : 32, 1902)년 4월 42세.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동곡(金堤郡 金山面 淸道里 銅谷)
상제님의 성예(聲譽)를 듣고 , 김형렬 제자의 인도로 입문.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김광찬 제자를 천거, 자신의 재산을 신앙생활에 전부 헌성하였다. 또 김보경 제자의 집에서 2차 세계대전 공사를 보셨다.
■생애
집안 대대로 진사 이상의 벼슬을 많이 했고, 함라 지역의 유지(100석 이상 수확)였다. 눈썹이 진하고 키가 190cm 정도로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어서 인근 지역에서 당해 낼 자가 없었다고 한다. 학문을 좋아하여 14세에 사서삼경을 뗐고, 서당에서 훈장을 하기도 했다. 안동 씨 문중일을 도맡아서 하였다. 상제님께서 당시의 함열현 회선동(咸悅縣 會仙洞) 김보경 제자의 집에서 천지공사를 보실 때에 물심양면으로 공헌하였다. 슬하에 두 아들(賢默, 聖默)과 세 딸을 두었다.

김성국(金成國)
■제자의 생애
본관 희천(熙川)
부(父) 김재서(金在西)와 모(母) 주씨(朱氏)의 장남 (長男)
농업
경진(庚辰 : 10, 1880)년 4월 8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金堤郡 金山面 金山里)에서 출생 슬하에 1남(貴男), 1녀(貴女)를 두었다.

김성화(金聖化)
■제자의 생애
본관 김해(金海)
부(父) 김덕원(金德元)과 모(母) 백씨(白氏)의 장남(長男)
농업
계유(癸酉 : 3, 1873)년 1월 2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에서 출생 슬하에 1男(順玉), 1女(足干)를 두었다.

김영선(金永善)
■제자의 생애
족보명 영두(永斗)
본관 김해(金海)
부(父) 김창진(金昌進)과 모(母) 이씨(李氏)의 장남
내무부 근무
신미(辛未 : 1, 1871)년 6월 16일, 전라북도 남원시(南原市)에서 출생. 거주지 : 1938년 까지 서울 황교에서 살도 남원시(南原市)로 이주. 병신(丙申 : 86, 1956)년 2월 4일, 전라북도 나뭔시(南原市)에서 86세로 작고.
김영선은 동생 봉문과 어려서 가출하여 서울에서 자랐다. 현재 내무부에 속하는 기관에서 근무를 하고, 동생 봉문(奉文, 昌善)은 무관(순검)으로 근무를 하였다. 후일 김병욱 제자를 잡으로 갔던 바로 봉문이었다고 한다. 서울 황교에서 유족하게 살았으며 남원역에 내려서면 김영선 제자의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였다고 한다. 묘(墓)는 남원시 향교동에 위치한다.

김자현(金自賢)
■제자의 생애
본명(족보) 언회(彦會)
본관 안동(安東)
부(父) 김원장(金元長)과 모(母) 박씨(朴氏)의 독자
농업5. 갑술(甲戌 : 4, 1874)년 4월 9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에서 출생. 정묘(丁卯 : 57, 1927)년 11월 10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에서 53세로 작고.
청도리에 거주하는 안동 김씨의 종가(宗家)집 장손(長孫)이며 김형렬 제자와는 사종형제(四從兄弟) 이다. 김자현 제자가 15세 연하이다.
■입도
임인(壬寅 : 32, 1902)년 4월, 29세.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 제비창골 안동김씨재실(安東金氏齋室)
김형렬 제자의 인도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음자를 가려 떼는 공사 외, 여러 공사에 참여.
■생애
상제님을 따르기 전에는 농사를 지었으며 학식이 많은 선비였다고 한다. 다리에 습종이 나서 고생하고 있을 때 김형렬 제자의 소개로 상제님을 만나 보니 창출 한 되 캐고 엿 다섯 가래를 사서 찧어 붙이라고 하셨는데 막내딸이 그것을 좀 떼어먹었다. 그래서 떼어먹은 만큼 습종이 덜 나았다고 한다.
"陰"자를 가려 떼는 공사와 청국 공사에 참여하셨으며 김자현 제자의 딸이 시두 손님에 걸려 있을 때 상제님께서 그 병을 치료해 주셨다. 상제님께서 어천 하시기 사흘 전에 김형렬 제자와 김자현, 그리고 다른 제자 한 분을 부르시더니 '내가 죽어도 믿음을 변치 않겠느냐'고 세 번 다짐을 받으셨다. 상제님 어천 후에 집안 살림이 바람이 불면 지붕에 실같이 엮어서 덮어놓은 짚이 모두 날아갈 정도로 어려웠다. 사람들의 병을 많이 고쳐 주며 포교를 하러 다닐 때 금산사 미륵전으로 수백 명이 모여서 치성을 드리기도 했는데, 그것이 독립운동을 한다는 오해를 사서 원평에서 잡혀 전주 형무소에 들어갔었으며, 한 번은 두승산에서 공부를 하다가 고부 경무청에 잡혀 들어가 모진 고생을 하였다.
김자현 제자가 작고하기 전에 이상호씨가 상제님 성적을 들려 달라고 수차례 간청을 했으나 이상호의 속마음이 야심이 많고 다른판을 꾸미려고 하는 기색이 보여서 얘기를 전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김형렬 제자의 손자 김현식 씨와 가족들이 지금도 전하는 말이다). 그런데 하루는 이상호씨를 만나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하며 만날 장소인 주막에 가서 이상호씨에게 '내가 서울 남대문에 가서 무슨 일을 보고와야 될 텐데 음력 10월 17일에 출발해서 5일 후 21일에 내려오려고 하니 돈이 있으면 1원만 달라.'고 해서 빌려 가지고 집으로 왔다고 한다. 그렇게 돌아와서 며느리에게 서울을 갈 테니 의복을 지어 놓으라하고 가족을 불러 태어난 해의 띠에 따라 부적을 그리고, 이름을 쓰고, 점을 찍어 불사르고 나서 10월 17일 아침 세수를 하다가 숨을 거뒀다 한다. 이 때 하늘에서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고 소나기가 쏟아 졌다고 한다. 이렇게 세상을 떠나자 이상호와 몇 명이 와서 5일 만에 오신다고 했으니 5일 장을 하라고 하며 양식을 대서 집에서는 3일장도 못할 형편이었으나 6일 만에 출상을 했다.
순천 장기동은 증산 상제님 어천 후 김자현 제자에게 상제님 말씀을 전해 듣고 구릿골에 와서 살았다. 그 때 김자현 제자의 막내딸이 상제님 신앙을 잘해서 '사돈을 삼자'고하여 자기동의 며느리가 되었고 장기동의 딸은 김형렬 제자의 며느리가 되었다. 슬하에 2남(泰振, 泰俊) 1녀를 두었다.

김준상(金俊相)
■제자의 생애
본명(족보) 기회(錡會)
본관 안동(安東)
부(父) 기윤(奇允)과 모(母) 황씨(黃氏)의 5남 1녀 중 장남(長男)
농업
무인(戊寅 : 8, 1878)년 5월 20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에서 출생. 병오(丙午 : 96, 1966)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에서 87세에 작고
김갑칠 제자의 친형이며 김형렬 제자의 4촌 동생이다.
■입도
임인(壬寅 : 32년 1902)년에서 무신(戊申 : 38년 1908)년 사이에 20대 후반기로 추정.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동곡(金堤郡 金山面 淸道里 銅谷).
상제님과 한마을 거주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자신의 집 한 칸을 상제님의 천지공사 약방으로 쓰게 하였으며 동생인 김갑칠 제자와 같이 상제님의 수종을 들었다.
■생애
아내의 병을 고쳐 주신 상제님께 그 대가로 집문서를 드렸으나 상제님은 집문서를 불살라 공사를 보신 후에 그 중 한 칸만 취하여 약방으로 쓰셨다. 부인 김씨(金氏)와의 사이에 두 아들(泰京, 泰一)을 두었다. 상제님께서 어천하시기 전에 "이 약방을 잘 지켜라." 하셨는데 이를 어기고 어천하신 후에 구릿골 약방을 최금봉이라는 사람한테 팔고 나서 며느리는 허령이 들리고 아들은 미치고 하나는 봉사가 되었다.

김형렬(金亨烈)
■제자의 생애
본명(족보) 원회(元會), 호 태운(太雲)
본관 안동(安東)
부(父) 김석필(金石必)과 모(母) 이씨(李氏)의 1남 1녀중 장남(長男)
농업
임술(壬戌 : 32, 1902)년 4월. 41세.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내광리 내주평 (金堤郡 金山面 內光里 內注坪)에서 출생. 임신(壬申 : 62, 1932)년 11월 28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에서 71세 작고.
이환구의 처가 김형렬 제자의 막내 동생이며, 형제인 김갑칠, 김준상 형제와는 4촌이며 김자현 제자와는 사종(四從)간이다.
■입도
임인 (壬寅 : 32,1902)년 4월, 41세.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金堤郡 金山面 淸道里 夏雲洞).
상제님과는 일찍부터 친면이 있었고 상제님께서 하운동으로 찾아 오셨다.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상제님을 가장 먼저 추종한 수석제자. 9년 천지공사시에 공사장의 식주인(食主人)으로서 온 집안 식구가 상제님의 수종을 들었다. 천지공사에 가장 일관되고 오랫동안 참관했으며 상제님 어천 후에도 변치 않는 믿음의 화신이었다. 후에 상제님의 천지공사 내용과 말씀을 많이 전하여 불멸의 공덕을 쌓았다.
■생애
또 상제님께서 김형렬 제자를 '지인지감(知人之鑑)' '구복대적(口腹大賊)' '좌불(坐佛)' '도선(徒善)'이라 평하셨다.
15세 때 정읍군 옹동면 불출암(佛出庵)에서 처음 상제님을 뵌 후로 뵈올 때마다 흠모의 마음이 생기던 중 동학혁명 후 상제님께서 제자하심을 듣고 하운동의 자기집으로 모시고 천지공사에 수종들게 되었다. 상제님께서 김형렬 제자로 하여금 신안(神眼)을 열어 주시어 천지공사에 신명의 회산(會散)과 청령(聽令)을 참관케 하시고 또 참관한 바의 확실성 여부를 물으시기도 하셨다.
임인(壬寅 : 32, 1902)년 4월부터 기유(己酉 : 39, 1909)년에 어천하시기까지 8년 동안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을 다하여 식주인으로서 상제님의 수종을 들었다. 많은 제자들을 천거하여 천지공사에 쓰일 수 있도록 하였다.
상제님 어천 후에 한때 정읍 대흥리에 왕래 하다 차경석 제자의 불의하에 분개하여 홀로 포교를 시작하여 임술(壬戌 : 52 , 1922)년 교단 이름을 미륵불교(彌勒佛敎)라고 하고 조직력을 가동하여 교세가 흥왕하기 시작하였다. 보천교를 탈퇴한 이상호에게 상제님의 천지공사 내용과 성훈을 전하고 호풍환우(呼風喚雨)를 임의로 행하는 기적을 보여 수많은 신도가 모였으나 간부들이 불화하였고 자신이 작고한 뒤로는 교단이 해산되었다.

문공신(文公信)
■제자의 생애
본명 남용(湳용) 호 영산(瀛山).
본관 남평(南平)
부(父) 문희규(文喜奎)와 모(母) 최씨(崔氏)의 3형제 중 막내
농업
기묘(己卯 : 8, 1878)년 7월 13일, 전라북도 정읍군 정우면 회룡리(井邑郡 淨雨面 回龍里)에서 출생. 갑오(甲午 : 84, 1954)년 5월 7일, 전라북도 정읍군 정우면 회룡리 자택에서 75세로 작고
■입도
정미(丁未 : 37, 1907)년 가을. 29세 . 전라남도 순창군 쌍치면 종암동 농바우(淳昌郡 雙置面 鐘岩洞 籠岩)
불교, 천주교, 동학 등을 통해 새 진리를 찾던 중 상제님을 만남.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문공신 제자는 상제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신앙한 의로운 제자이다. 정미년 가을에 입도한 이래 독조사 도수, 문왕과 이윤의 도수, 선기옥형의 저울끈 도수 천지대팔문 도수, 그리고 문공신 제자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는 정음정양 도수를 맡으셨다.
■생애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를 받기도 하고 동학신도가 되어 동학혁명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모든 것에 회의를 느끼고 새로운 진리를 갈구하던 중 순창 농바우에서 처음 상제님을 만나 따르게 되었다. 처음 뵌 상제님께 천지공사 경비로 천 냥을 드릴 정도로 신심이 돈독하고 구도의 정열이 남다르게 돋보였다. 4백여 석의 재산을 상제님 수종하는 데 모두 바쳤다. 상제님 어천 후에는 주로 수도를 전념하고 자리를 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지만 자신을 위해서 밥 세 끼도 겨우 먹을 정도로 가난하게 지냈다고 한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치성 때 오륙십 명 정도가 모여 자연 교단이 형성되었지만 상제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반적인 교화 이외에 조직적인 포교활동은 하지 않고 교명도 짓지 않았다.

문학철(文學哲)
■제자의 생애
본관 남평(南平)
부(父) 문희규(文喜奎)와 모(母) 최씨(崔氏)의 장남(長男)
농업
경진(庚辰 : 도기 10, 1880)년 5월 19일,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 궁사리(井邑郡 泰仁面 弓四里)에서 출생
부인 황강씨(黃姜氏)와의 사이에 1男(完三)을 두었고, 둘째 부인 박천만(朴千万)과의 사이에 2女(福禮, 福順)를 두었다. 문공신 제자의 맏형으로 백의군왕 백의장상 도수 공사에 참여하여 고부경무청에 수감 되었다.

박공우(朴公又)
■제자의 생애
호 인암(仁庵)
본관 밀양(密陽)
부(父) 박순문(朴順文)과 모(母) 오묘전(吳卯田)의 장남(長男)
장사(장치기꾼)
병자(丙子: 6, 1876)년 6월 5일, 전라북도 전주시 교동(全州市 校洞)에서 출생.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원평(金堤郡 金山面 院坪)에서 거주.
경진(庚辰 : 70, 1940)년 12월 22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원평(金堤郡 金山面 院坪)자택에서 65세로 작고.
■입도
정미(丁未 : 37, 1907)년 32세, 전라북도 정읍군 정우면 장순리(井邑郡 淨雨面 長順里 : 고부 솔안)
차경석 제자가 상제님을 박공우의 집으로 모시므로 뵙고 추종.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후천개벽기의 천상 신병대장으로 임명받았으며 의통인패를 전수 받았다. 상제님을 만난 이후 상제님을 가장 많이 따라다니며 수종들었다.
■생애
전라도 정읍, 고창, 홍덕의 세 장(場)을 치던 소위 장치기꾼으로 한때는 고창에서 기독교 신앙을 하면서 수십 명을 전도한 경력도 있었다. 후에는 동학을 신앙하였다. 상제님 추종 제자 중 체격과 힘이 가장 좋았고 뚝심좋은 성격에 의리기 강하였다. 자신이 싸움을 잘하기도 하였지만 누가 싸우는 것을 보면 그 곁을 떠나지 않고 한참 바라보다가 옳은 사람의 편이 되어 같이 싸우기도 할 정도로 불의를 보면 절대로 참지 못한느 성격이었다. 체형은 전체적으로 장대하고 건장하였다. 얼굴은 쌍꺼풀이 있었으며 수염은 보통이었고 음성은 사방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웅장했다. 행동이 소탈하고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들었다고 한다. 상제님의 9년 천지공사 후반기인 정미(丁未 : 37, 1907)년 6월 1일, 차경석 제자의 인도로 고부 솔안의 자택에서 상제님을 처음 뵌 후로 다음날부터 상제님을 추종하기 시작했다. 상제님께서 박공우 제자를 많이 대동하고 다니시면서 그 이유가 '네 맷속에 경위(經緯)가 많은 연고라' 하시고 나와 친구로 지내자고 하실 정도로 의로운 정신을 높이 평가하셨다. 하지만 그의 성질이 너무 거칠다고 탓하시면서 인품과 성격을 개조하시면서까지 그에게 후천개벽 집행시 병겁으로 인명을 다스리는 신병대장으로 임명하셨다. 또 의통(醫統)구워을 집행하는 조직인 6임 공사의 도수를 그에게 붙이셨고 어천 하시기 전날 발에는 아무도 모르게 의통인패 만드는 법을 전수하셨다.
유달리 정이 깊고 의리가 강한 성품이라 상제님 어천 후에도 상제님을 잊지 못하고 많은 방황을 하다가 갑인(甲寅 : 44, 1914)년부터 정읍군 흥덕(興德)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그 수가 2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교단은 속육임과 겉육임의 조직으로 운영하였다. 하루는 비가 많이 오는 날 밖에서 돌아오는데 그를 추종하는 신도들이 밖으로 마중 나와 보니 비에 옷이 젖지 않았으며, 비가 오려 하면 '오지 마라'고 말을 할 뿐인데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일본 순검에게 붙잡혀서 감옥에 들어가 계실 때 주문을 지성으로 읽으니 옥문이 저절로 열려서 나왔다고 한다.
김복덕(金福德)과 혼인하여 슬하에 5남(美道, 二道, 三道, 四道, 奉學) 5녀(今女, 順德, 順道, 順金, 良今)를 두었으며 셋째 아들인 삼도(三道)를 이옥수(李玉壽)와 혼인시켜 이중성과는 사돈이 되었다. 원불교(圓佛敎)의 창시자인 박중빈과는 재종(再從)간이다. 장지(葬地)는 김제군 봉남면에 있는 삼덕교본부(三德敎本部)부근 공동묘지로 부인과 함께 모셔져 있다.

박장근 (朴壯根)
■제자의 생애
본명 춘백(春栢)
본관 고령(高靈)
장남(長男)
농업
■입도
정미(丁未 : 37년, 1907)년 가을,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종암동 농바우(淳昌郡 雙置面 鐘岩洞 籠岩)
동학을 신봉하다가 상제님의 성예(聲譽)를 듣고 추종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상제님께서 자신의 집에서 회문산 오선위기도수(五仙圍碁度數)공사를 보실 때 수종을 들었다.
정씨(鄭氏)와 결혼하여 1남(正甫)을 두었다.

백남신(白南信)
■제자의 생애
본명 낙신(樂信), 남신(南信)은 어사명(御賜名)
본관 수원(水原)
부(父) 백현수(白顯洙)와 모(母) 정씨(鄭氏)의 장남(長男 : 養子)
무관(武官 : 육군 부령(副領), 대실업가)
무오(戊午 : 前 13, 1858)년 12월 9일, 전라북도 완주군 관촌면(完州郡 關村面)에서 출생.
본적 :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경신 (庚申 : 1920)년 1월 26일, 63세로 작고.
■입도
계묘(癸卯 : 33, 1903)년 봄, 46세
김병욱 제자의 천거로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수많은 돈을 상제님의 천지공사 소요 경비로 헌성하였다.
■생애
배진수(白晉洙)와 최씨(崔氏) 사이에서 6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생부(生父)으 종제(從弟)인 현수(顯洙)의 집안으로 입양되었다. 양부(養父)는 20대에 승정원 좌승지 벼슬을 하였는데 일찍 돌아가시고 후손이 없어 20대 과부가 된 부인 정씨(鄭氏)가 자손을 잇기 위해 생가의 둘째 아들이던 남신을 양자로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생가에서는 집안에서 남신이 제일 똑똑하다고 양자로 내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 양모인 정씨가 하루는 꿈을 꾸는데 집안으로 말(馬)이 들어왔다고 한다(이것은 백남신 제자가 태어난 해에 해당하며, 지금도 그의 묘비에 이 이야기가 적혀있다). 생가에서 남신을 그렇게 주지 않으려고 하므로 남신의 양어머니신 정씨가 아예 그의 생가에 가서 마당에 거적을 깔고 앉아 굶었다. 이것을 보다 못한 생가에서 나중에는 큰일 났다며 '저 청춘과부가 죽으면 큰 귀신이 돼서 잘못되게 생겼다.'며 백남신 제자를 양자로 내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게 해서 양자로 들어온 남신은 처음에는 배포도 크고 해서 젊은 양어머니가 키우는데 애도 많이 먹었지만 아주 엄하게 가르치면서 키웠다고 한다. 계사(癸巳 : 23, 1893)년 38세에 종 8품의 무직(武職)인 무사과궁내주사(富司果宮內主事) 로 궁궐(宮闕)내의 관직에 임용되었다. 그 후 육군 전주 진위대(鎭衛隊) 향관(餉官)으로 배속받아 직속상관인 이재한(전주진위대 대장으로 추정)과 함께 고종황제의 직명으로 동학혁명을 평정하기도 했다. 백남신 제자의 원래 이름은 낙신(樂信)인데 동학혁명을 평정한 후 고종황제가 "삼남(전라, 경상, 충청)은 믿고 맡길 신하다."라는 의미로 남(南)자 신(信)자의 이름을 하사해서 남신(南信)이 되었다.
계묘(癸卯 : 33, 1903)년 김병욱 제자에 의해서 상제님께 천거될 때는 김병욱 제자의 상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제님을 추종하면서부터는 천지공사에 필요한 비용과 동곡약방을 만드는데 필요한 비용과 동곡약방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등 많은 재물(20만 냥 이상)을 헌성하여 여러 제자중 물질적으로 가장 큰 공헌을 하였다. 갑진(甲辰 : 34, 1904)년 정월에 관액에 걸려 상제님께서 풀어 주신 이후로는 오히려 참령(參領 : 영관급으로 현재의 소령에 해당)으로 진급되어 육군 전주진위대 대장이 되었다. 이 때 김병욱 제자는 무기주관(武器主管) 참위(參慰 : 위관급으로 현재의 소위에 해당)로 직속부하였다.
백남신 제자가 관직에 있을 때 서울에 자주 왕래를 해서 서울에 마련해 놓은 집이 낙원동의 현재 낙원 시장이 들어서 있는 곳에 건평이 1,000평에 98칸의 대규모였는데 당시 조선에서 가장 잘된 집을 보러 나올 때는 이 낙원동의 집에 왔다고 한다. 을사(乙巳 : 35,1905)년에 일제의 강점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 열사와는 막역한 친구로 지냈는데 그가 자결하는 남 백남신 제자의 집으로 찾아와 서성거리다가 사랑방에 손님이 많이 와 있어서 다른 곳에 가서 자결했다고 한다.
일제가 우리 땅을 강점하여 1907년 8월 전국의 진위대가 해산된 이후 백작의 작위를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관직을 버리고 야인이 되어 농산물 집산지인 이리에 자리를 잡고 쌀장사를 했다. 그 때는 쌀을 군산에서 인천항 해로를 통해 서울로 운반했는데, 한 번은 배에 쌀을 선적하는 사이에 쥐가 쌀가마니를 뚫어서 그것을 손질하느라고 며칠 동안 군산에서 배가 뜨지 못하고 있는데, 그 며칠 사이에 서울에서 쌀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큰 이득을 보게 되었다. 이후로 신명이 돕기라도 한 듯 굉장한 부를 축적하였다. 그 부의 정도가 집의 하인만 해도 한 50명이 있었고 인력거도 두 대로 하나는 아들인 인기가 타고, 하나는 식구들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 당시에는 인력거 다음이 자가용으로서 조선총독과 고종황제만이 캐딜락을 타고 다녔을 뿐 차가 없었느데 그 때 백남신 제자도 캐딜락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약간은 검은 피부에 키는 160cm가 조금 넘었고, 식사를 할 때는 늘 '큰상에다가 반찬을 꽉 차게 많이 하라'며 '내 상에 많이 해놔야 내가먹고 물리면 집안 식구들이 많이 먹을 수 있지 않느냐' 했다고 한다. 박씨(朴氏)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인 인기는 일제시대 때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당시의 동일은행을 창립하고 전매청의 전신인 연초공사와 한국 최초로 생긴 경성 고무공장을 운영하였으며 경성 전기회사의 감사를 맡았다.

서원규(徐元奎)
■제자의 생애
본명 상의(相儀), 자(字) 자준(子俊)
본관 이천(利川)
부(父) 서경문(徐慶聞)의 장남(양자)
한약방 경영
을묘(乙卯 : 前 16, 1855)년 출생 을해(乙亥 : 65, 1935)년 6월 17일, 81세로 작고. 묘지(墓地) :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任實郡 館村面)
■입도
계묘(癸卯 : 33, 1903)년 1월 , 49세. 전라북도 전주부 서천교(西川橋) 사거리 약방(藥房)
■생애
당시에 저주부에서 가장 큰 한약건재상을 운영하였는데 약방의 규모가 약령시장이 끝나면 시장의 남은 약재를 모두 약방의 창고에 보관할 정도로 컸다고 한다. 이 약방이 위치한 곳이 정읍쪽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고개인 용머리고개를 넘어서 서천교를 지나면 커다란 사거리가 나오는데 이사거리 근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 곳이 금산면 동곡약방과 태인, 정읍사이의 교통의 요지이고 번화가여서 상제님께서 오가시는 길에 많이 들르신 것으로 추정되며, 계묘(癸卯 : 33, 1903)년 상제님의 9년 천지공사 전반기에 당시 전주부에살던 김병욱, 김윤찬 제자가 상제님께서 약방에 머무실 때 서원규 제자와 함께 상제님을 추종하기 시작한 곳이다. 장효순의 난 때 잠시 머무시기도 했으며 김병욱 제자가 친일파로 몰려 화를 당할 때 같이 머무시면서 화를 끌러 주시기도 한 곳이다. 서원규 제자는 이사를 많이 다녔으며 이곳 저곳에 많은 땅을 사 두고 소작을 주고 도조를 받았다고 하며 그 규모가 7~8백 석 정도되는 갑부였다. 또 그의 나이 40대에 일생에 크게 죄지은 것이 있어서 보상을 해야겠다고하며 그의 누이의 주선으로 구이면(九耳面)에 있는 백석거리의 땅을 떼어 주면서 당시에 다 쓰러져 가는 모악산 대원사를 중수하였다. 부인 김씨(金氏)와의 사이에 4남 3녀를 두었다. 장손(長孫)인 익봉(益奉)을 백남신 제자 친가 셋째 동생의 딸인 옥주(玉朱)와 혼인 시켰다.
신경수(申京守)
■제자의 생애
본관 평산(平山)
부(父) 신일권(申日權)과 모(母) 전씨(全氏)의 장남(長男)
농업
무술(戊戌 : 前 33, 1838)년 2월 19일 출생.
거주지 : 전라북도 정읍군 정우면 회룡리(淨雨面 回龍里)
계해(癸亥 : 53년 1923)년 1월 27일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에 있는 자택에서 86세로 작고
■입도
연대 : 정미(丁未 : 37년, 1907)년 겨울, 70세. 전라북도 정읍군 정우면 회룡리 운산마을(淨雨面 回龍里 雲山)
동학을 신봉하다 상제님의 성예(聲譽)를 듣고, 문공신 제자의 천거로 입문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운산리(雲山里) 자택에서 공사를 보실 때 수종을 들었으며 일월대어명도수(日月大御命度數)와 수명소(壽命所)사명을 받았다.
■생애
상제님 제자 가운데 가장 많은 나이(70세)에 문공신 성도의 인도로 운산리(雲山里) 자기 집에 오신 상제님을 처음 뵙게 되엇다. 상제님을 추종하기 시작한 첫해인 정미년 겨울에 상제님께서 문공신 제자의 집에서 선기옥형도수(璿璣玉衡度數)의 천지공사를 보실 때 신경수 제자의 집에는 日月大御命度數)를 정하셨다. 이후 무신년 여름에는 신경수 제자의 집에 수명소(壽命所)를 정하시는 공사를 보셨다. 슬하에 딸 문화(文化)를 두었으며 절손되었다.

신경원(申京元)
■제자의 생애
본명(족보) 규석(奎錫), 자(字) 경언(敬彦), 경원(京元)은 도명
본관 영월(寧越)
부(父) 신재덕(辛在德)과 모(母) 시재화(柴在化)의 장남(長男)
관왕묘의 제원(祭員)
계해(癸亥 : 前 8, 1863)년 2월 14일,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泰仁面)에서 출생.
갑자(甲子 : 54, 1924)년 12월 16일,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泰仁面) 자택에서 62세로 작고.
■입도
정미(丁未 : 37, 1907)년 4월 45세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 관왕묘(泰仁面 關王廟)
신원일 제자의 인도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상제님께서 태인에 오시면 항상 물심양면으로 수종을 들었으며 상제님께서 오래 머무르시며 공사를 보셨다.
■생애
태인에 모셔진 관운장(關雲長) 사당인 관왕묘의 제원(祭員)을 재낼 때 이웃 사람들은 그를 신참봉(辛參奉)으로 호칭하였다.
나이 45세 되던 정미년 4월에 신원일 제자의 인도로 관왕묘 아래에 있는 자신의 집을 찾아오신 상제님을 처음 뵙게 되었다. 이 때 자신의 집에서 보신 공사와 다음날 관왕묘안의 관운장 삼각수 한 갈래가 떨어져 없어지는 것을 보고 상제님의 공사에 대한 관운장의 응답이라고 생각하여 이 뒤로 상제님을 추종하게 되었다. 신경원 제자는 점잖은 성품과 인자한 인격을 지녔다. 솥점을 경영하고 있었지만 집안 살림은 그렇게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고. 집에서 일하는 아이(여자)가 한 명 있을 정도였다. 신경원 제자가 살던 곳은 현재는 면소재지이지만 당시에는 16개 면을 관할하던 태인군의 중심지역으로 인근에 문물(文物)이 가장 흥왕하던 곳이다. 상제님께서는 천지공사 후반기에 태인에 오시면 주로 신경원 제자의 집에서 유숙하시고 많은 공사를 보셨으며 이 때 신경원 제자가 정성을 다해 수종 하였다. 이 때 같은 태인 지역의 유지와 학자인 김경학, 최창조, 최내경, 최덕겸 제자 등이 함께 상제님을 추종하기 시작했다.
신원일 제자는 3종숙부(三從叔父)로 친족이다. 슬하에 친자(親子)를 두지 못하고 큰집의 7촌 조카인 영식(泳寔)을 양자로 두어 사실상 절손되었다.

안내성(安乃成)
■제자의 생애
본명 내선(乃善), 호 경만(敬萬)
본관 순흥(順興)
부(父) 안성유(安成有)와 모(母) 남씨(南氏)의 장남(長男)
농업
정묘(丁卯 : 前 4, 1867)년 9월 25일,경상남도 함안군 가야면 도음실(咸安郡 伽椰面 道陰實)에서 출생. 기축(己丑 : 9, 1949)년 10월 25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金堤郡 金山面 淸道里)자택에서 83세로 작고.
■입도
정미(丁未 : 37, 1907)년 가을, 41세. 전라북도 김제군 금사면 원평(金堤郡 金山面 院坪)
■생애
상제님의 여러 제자들 중에서 어린 시절을 가장 험난하게 보낸 사람이 안내성 제자이다. 일찍이 그의 조부가 부친에게 '저 아이는 글을 가르칠 아이가 아니니 내버려 두라'고 명하므로 당시의 양반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할아버지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긴 하지만 화가난 그의 아버지가 집을 떠나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12세 때 할아버지는 돌아기시고 안내성 제자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중국에까지 다녀온 끝에 정미년에 원평에서 상제님을 뵙고 따르게 되었다.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로 안내성 제자는 차경석 제자의 집에 본소를 전하시고 교단을 창립할 때 같이 참여하여 포교활동을 시작했으나 차경석 제자의 불의함에 반발하여 서로 싸운 뒤에 따로 나가 교단을 창설하였다. 그 때가 갑인(甲寅 : 44. 1914)년 봄이고 13년후인 정묘(丁卯 : 57, 1927)년 지금의 금산면 청도리 백운동에 수백 명의 교인이 이주하여 교인촌을 이루게 되었다. 한때 신도 수가 3천여 명에 이르고 교명을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라 하였으나 안내성 성도의 작고 후로는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고 말았다. 본처인 최말순과의 사이에 7남 6녀를 두었다.

유찬명(柳贊明)
■제자의 생애
본관 전주(全州)
부(父) 유경술(柳敬述)과 모(母) 박씨(朴氏)의 장남(長男)
농업, 학자
병인(丙寅 : 前 61, 1866)년 3월 15일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에서 출생.
신미(辛未 : 61, 1931)년 2월 18일 청도리에서 62세에 작고.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상제님께서 구릿골에서 외처로 가시는 길목에 집이 위치해 있어서 자주 머무르셨고 집에서 공사를 보실 때마다 수종을 들었다.
■생애
모악산의 서쪽 줄기에 싸리재가 있는데 당시에는 이 길이 정읍, 김제 쪽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로 이 고개와 구릿골 사이에 유찬명 제자의 집이 있었다. 상제님께서 외처로 출입하시는 길에 자주 들르셨을 뿐 아니라 여러 제자들과 함께 며칠씩 머무르시면서 많은 공사를 보셨다. 같은 마을에 김송환 제자가 살았고, 맞은편 모악산 주봉 쪽으로는 안내성 제자의 교인촌이 있는 백운동이 바라다보인다. 소작을 주면서 농사로 생계를 이었고 학식이 많은 학자였다고 하는데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실 때 그로 하여금 많은 글을 쓰게 하셨다고 한다. 상제님 어천 후에는 교단 활동에 참가하지 않고 자택에서 개인 신앙을 하였다. 부인 최씨(崔氏)와의 사이에 2남(在玉, 在用), 3녀(一善, 二善, 三善)를 두었다.

이도삼(李道三)
■제자의 생애
본관 경주(慶州)
부(父) 이이화(李二化)과 모(母) 박씨(朴氏)
세째아들
병자(丙子 : 6, 1876)년 8월 15일, 전라북도 전주군 이서면 남계리(全州郡 伊西面 南溪里)에서 출생 슬하에 3男, 4女를 두었다.
이치복(李致福)
■제자의 생애
본명 영노(榮魯), 자(字) 치화(致和), 치복(致福)은 도명, 호 석성(石城)
본관 전주(全州)
부(父) 이석기(李碩璣)와 모(母) 임씨(林氏)의 셋째 아들
경신(庚申 : 前 11, 1860)년 4월 16일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下西面 晴湖里)에서 출생
거주지 :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원평(금산면 원평) 갑신(甲申 : 74, 1944)년 8월 28일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下西面 晴湖里)에서 85세로 작고
이화춘 (李化春)
■제자의 생애
본명 함교(咸敎)
본관 전주(全州)
부(父) 이우윤(李愚潤)과 모(母) 최씨(崔氏)의 장남(長男)
농업
경오(庚午 : 前 1, 1870)년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淳昌郡 雙置面 金城里)에서 출생. 거주지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요동(淳昌郡 雙置面 金城里繞洞) 인근의 먹상리 마을에서 일을 하고 오던 중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부인 유옥호(柳玉鎬)와의 사이에 아들 대종(隊宗)을 두었다.
이환구(李桓九)
■제자의 생애
자(字) 익겸(益謙),호 낙산(樂山)
본관 전주(全州)
부(父) 이종각(李鍾珏)과 모(母) 정씨(鄭氏)의 2남 중 차남
농업
기묘(己卯 : 9, 1879)년 8월 6일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 성근리(東津面 下長里 成根里)에서 출생. 임진(壬辰 : 82, 1952)년 7월 26일 성근리 (成根里)에서 85세로 작고.
■입도
을사(乙巳 : 35, 1905)년 1월 26세.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 성근리에서 처형(妻兄)인 김형렬 제자가 모시고 온 상제님을 뵙고.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자신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무르시면서 천지공사를 보신 상제님의 수종을 들었고 당시 부안읍에 거주했던 신원일 제자를 천거했다.
■생애
특별한 신앙의 행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妻兄)인 김형렬 제자의 인도로 자신의 집으로 오셔서 공사를 보실 때의 상제님을 뵙고 수종을 들었으며 신원일 제자를 천거했다는 정도의 신앙력만 전해 내려 올 뿐이다. 김형렬 제자의 막내 동생과의 사이에 3형제(羲澤, 羲同, 羲裁)를 두었다. 막내 아들인 희재(羲裁)씨는 현재 73세로 성근리에서 살고 있다.

전태일 (全泰一)
■제자의 생애
자(字) 행중(行中)
본관 천안(天安)
부(父) 전영호(全榮鎬)와 모(母) 윤씨(尹氏), 장남(長男)
농업, 서당운영, 동학신봉
신유(辛酉 : 神道前 10, 1861)년 10월 6일, 전라북도 정읍군 용북면 화호리(龍北面 禾湖里) 숙구지(宿拘地) 마을에서 출생
■입도
기유(己酉 : 39, 1909)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동곡약방
동학을 신봉하면서 시천주(侍天主)를 읽다가 어느 노인의 가르침으로 동곡약방에 들러 상제님을 뵙고.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상제님께서 그로 하여금 숙구지(宿拘地)공사를 보셨다.
■생애
당시 살던 지역의 동학 두목격으로 열성으로 신봉하였다고 한다. 집에 들르는 동학 신앙인들의 접대로 가산을 전부 바쳤다고 하며 서당을 운영하고 대장간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시천주를 읽다가 어느 노인의 가르침으로 상제님을 처음 찾아 뵙고 태을주를 받아서 숙구지(宿拘地)공사 적임자가 되었다. 후손들의 이야기로는 당시의 숙구지 동네에는 전씨(全氏) 성을 가진 집이 큰집을 포함하여 두 집 있었는데 동학을 신앙한 분은 자신의 조부였다고 한다. 부인 정공선 (鄭公先)과의 사이에 아들 봉필(奉弼)을 두었다.

정성백(정성백)
■제자의 생애
본명 우명(遇明)
본관 나주(羅州)
부(父) 정춘심(鄭春深)과 모(母) 김씨(金氏)의 5남 1녀중 장남.
농업
신사 (辛巳 : 11, 1881)년 1월 11일 전라북도 익상군 오산면 영만리(五山面 永萬里)에서 출생. 병진(丙辰 : 46, 1916)년 11월 15일 익산군 오산면 영만리에서 36세로 작고.
■입도
갑진(甲辰 : 33, 1903)년 8월 24세 익산군 오산면 영만리에서
■생애
아버지인 정춘심 제자와 함께 상제님을 신앙했으며 김형렬 제자의 큰딸과 결혼해서 김형렬 제자의 사위가 되었다. 상제님께서 정성백 제자의 만성리 집에서 며칠씩 쉬어 가시곤 하셨으며 버선발로 집에 오셔도 버선에 흙이 묻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상제님 어천 후에는 치성 때면 장인인 김형렬 제자가 있는 구릿골로 몇 년 동안 다니면서 신앙 생활을 했고 5년 정도 누워 중병을 앓다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작고하였다. 부인 김씨(金氏)와의 사이에 2남(昌勉, 仁勉) 1녀(福女)를 두었다.
정춘심(鄭春深)
■제자의 생애
본명 방회(芳會)
본관 나주(羅州)
부(父) 정상진(鄭相眞)과 모(母) 박씨(朴氏)의 4형제 중 차남
농업
기미(己未 : 前 12, 1859)년 2월 10일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長項)에서 출생.
을축(乙丑 : 55, 1925)년 2월 6일 익산군 오산면 영만리(五山面 永萬里)에서 67세로 작고.
■입도
갑진 (甲辰 : 33, 1903)년 8월. 46세. 전라북도 익상군 오산면 영만리에서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상제님께서 정춘심 제자의 집에서 남조선 배도수 공사를 보셨다.
■생애
어려서부터 천성이총명하고 민첩하여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10여 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홀로 되신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성장하여서는 만성리 부근에 논 120마지기를 경작아혀 부유하게 살았다. 45세의 비교적 많은 나이에 장남 성백(成伯)과 함께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다. 김형렬 제자의 딸의 장남인 성백(成伯)과 함께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다. 김형렬 제자의 딸을 장남인 성백(成伯)과 혼인 시켰다. 부인 김씨(金氏)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차경석 (車京石)
■제자의 생애
본명 윤홍(輪洪), 경석(京石)은 도명.
본관 연안(延安)
부(父) 차치구(車致九)와 모(母) 밀양박씨(密陽朴氏)의 4남 1녀 중 장남
동학 총대(總代)
경진(庚辰 : 10, 1880)년 6월 1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호암리(富安面 壺岩里)에서 출생 . 병자(丙子 : 66, 1936)년 3월 10일 오전 11시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본소(井邑郡 立岩面 大興里本所)에서 57세에 작고(仙化)
■입도
정미(丁未 : 37, 1907)년 5월 말, 28세.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쌍룡리 용암(金山面 雙龍里 龍岩)마을
■생애
부친인 차치구(車致九)는 일찍부터 동학을 신앙하여 갑오 동학혁명 당시 전봉준 장군 아래의 군단장급으로 활약한 혁명가이다. 하지만 혁명의 실패로 참형당했고 이런 연유로 차경석 제자는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동학을 신앙한다고 한때 일진회에 가입하여 전라남북도 순회관을 지낸적도 있다. 그러나 일진회의 행보에 불만을 품고 탈퇴, 다시 손병희를 쫓아 천도교를 신앙하다고 그도 뜻에 안 맞아 새 진리를 찾던 중 상제님을 뵙게 되었다.
상제님께서 차경석 제자를 처음 만나실 때 김형렬 성도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길이 길행이라. 한 사람을 만나려 함이니 장차 제게 알리리라."고 하실 정도로 천지공사 도정 속에 아주 중요한 인물로 이미 만날 것을 계획하고 계셨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차경석 제자는 세무관과의 송사문제로 전주로 가는 길에 용암리 물방앗간 앞 주막에 잠시 쉬려고 들렀다가 상제님을 만나게 된다. 처음 뵌 상제님께 반한 그는 상제님의 박대에도 불구하고 따르기를 간청하여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상제님을 뵙고 대흥리로 모시고 가기에 이르렀다. 이 길에 친구인 박공우 제자의 집에 들러 박공우 제자도 같이 상제님을 추종하게 되었다. 정미(丁未 : 37, 1907)년 5월말에 상제님을 처음 뵙고 이듬해 무신(戊申 : 38, 1908)년 가을에 순창 농바우 박장근 제자의 집에 가셔서 예로부터 이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인 농바우 속의 갑옷과 투구와 큰칼의 기운을 붙여 주시고 이후에 "너는 병부가 마땅하리라." 하시면서 직신(直臣)이기에 맡기노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상제님께서는 그의 타고난 뱃심과 야망을 익히 아시고 그것을 도운에 투영시켜 동학 30만 신명을 해원시키고 1변 난법도운의 바람을 일르키시기 위하여 그에게 30만 동학신명을 자신의 마음대로 사역시켜 그의 뱃심과 야욕을 풀어헤칠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천자를 자처하고 상제님을 배신할 줄 미리 아시고 많은 말씀으로 그의 미래를 경계하셨다.
상제님 어천 이후 다른 제자들처럼 그도 처음에는 방황을 하다가 님께서 대흥리에 포정소를 정하시고 포교의 문을 여시매 처음에는 수종을 들다가 차츰 교권 쟁탈의 야욕을 품어 님과 종도들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기어이 무오(戊午 : 48, 1918)년 님을 김제군 백산면 송삼리로 가시게 하면서 자신이 교단을 움켜쥐었다. 이로부터 그가 사망한 병자(丙子 : 1936)년 까지 일제의 숱한 탄압 속에서 700여 만에 이르는 보천교 신도들을 규합하여 세계종교사상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 4형제 중 장남이며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최덕겸(崔德兼)
■제자의 생애
본명 병한(炳瀚)
본관 삭령(朔寧)
부(父) 최홍구(崔洪九)와 모(母) 김씨(金氏)의 장남
농업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 덕두리(泰仁面 德斗里)에서 출생
신묘(辛卯 : 81, 1951)년 5월 15일 정읍군 태인변 덕두리에서 작고.
■입도
정미(丁未 : 37년 1907)년 4월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
태인 지역의 신경원, 김경학, 최창조, 최내경 제자 등과 같은 시기에 입도
■생애
김경학, 최창조 제자와 인근 마을에 살았으며 같은 시기에 상제님을 추종하기 시작했다. 생활이 넉넉한 편이었고 지역의 유지로 행세했다. 상제님 어천 후에는 상제님 같은 선생님을 다시 모신다고 많은 지역을 방황하며 돌아다녔다. 슬하에 아들 경우(敬宇)를 두었다.

최창조(崔昌祚)
■제자의 생애
감찰관(監察官)
전라북도 정읍군 옹동면 매정리 내동(瓮東面 梅井里 內洞)에서 출생하여 이곳에서 작고.
■입도
정미(丁未 : 37, 1907)년 4월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
상제님께서 태인 관왕묘(關王廟)의 제원으로 있는 신경원의 집에서 관운장 협조 공사를 보신 후에 태인 지역에 거주하는 신경원, 김경학, 최덕겸, 최내경 제자 등과 같은 시기에 입도했다.
■생애
감찰관(監察官)을 지냈으며 상제님을 추종하던 시기에는 태인 새올에서 7,8년 정도 살았다. 이후 정읍군 옹동면 내동에서 오래 살았으나 이사를 자주 다녔다. 180cm이상의 큰 키에 얼굴은 약간 길고 긴 수염이 명치까지 났으며 힘도 장사였고 풍채가 좋았다. 언제나 꼭 하실 말씀만 하셨으며 점잖으신 성품이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백암리 원백암 마을에 김경학 성도가 살았으며 덕두리에는 최덕겸 제자가 살았다. 상제님께서 이 곳에 오시면 세 제자의 집에서 번갈아 들르시며 공사를 보셨다. 특히 김형렬 제자를 명하여 문 밖에서 화둔공사를 보게 하셨다.

허성희(許聖熺)
■제자의 생애
본관 시산(時山)
부(父) 허준여(許俊汝)와 모(母) 홍씨(洪氏)의 장남
농업
기미(己未: 前 12, 1859)년 6월 14일 전라북도 김제군 부량면(扶粱面)에서 출생
병술(丙戌 : 76, 1946)년 5월 2일 김제군 부량면에서 88세로 작고.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백의군왕 백의장상도수에 참여하여 고부경부청에 수감되었을 때 여러 제자들이 불평을 잘 효유하여 공사가 무사히 끌러지도록 공헌.
■생애
완고한 성품으로 누구한테 굽히는 것이 없이 남아다웠으며 그 고을에서는 빠지지 않을 인물로 후덕한 성미에 학식이 많았다. 인근 사람들이 장군감이라고 할 정도로 키가 1m 90cm정도로 컸고, 눈이 위로 찢어지고 귀도 컸으며 전체적으로 신체가 건장했다고 한다. 외출시에는 백마를 잘 타고 다녔는데 거동할 때는 옆에 있는 풀잎이 흔들릴 정도로 풍채가 당당했다고 한다. 동학을 신앙했으며 평소에 '강증산 상제님 이라야 일이 된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큰 며느리는 그런 말씀을 듣고 보천교를 신앙하게 되었고 보천교를 신앙하던 정성호씨의 딸을 둘째 며느리로 맞이했다. 한때는 지역 유지로 풍족하게 살았으나 언제부턴가 살림이 무척 어려워져서 비가 오면 썩은 초가지붕에서 물이 떨어져 그것을 맞으면서 살았다고 한다. 틈만 나면 늘 돋보기를 쓰고 책을 즐겨 보았다.
문공신 제자의 누님인 문씨(文氏)를 첫째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며 둘째 부인은 김씨(金氏)로 문씨의 소생인 장녀는 일찍 죽고, 김씨가 낳은 소생은 허복환을 비롯해 여덟 명이다.
집안에서 전하는 일화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어느날 김제장에 나가 명태를 사가지고 오셨는데 명태 머리가 전부 떨어져 있어서 여쭤 보니 오다가 갯다리(김제 부량면 소재)에서 귀신들을 만나 명태로 때려서 머리가 다 떨어져나갔다고 한다.

황응종(黃應鐘)
■제자의 생애
본명 정수(正秀), 자(字) 응조(應祚)
본관 창원(昌原)
부(父) 황내수(黃乃水)와 모(母) 조씨(趙氏)의 2형제 중 장남(長男)
농업
신축(辛丑 : 前 30, 1841)년 9월 26일 전라북도 정읍군 정우면 회룡리(淨雨面 回龍里)에서 출생. 정묘(丁卯 : 37, 1907)년 8월 4일 정읍군 정우면 회룡리에서 87세로 작고.
■입도
정미(丁未 : 37, 1907)년 가을, 67세
문공신, 신경수 등 한 동네 사는 제자들과 같은 시기에 동학을 신봉하다 상제님의 성예(聲譽)를 듣고 입도.
■천지공사에서의 역할과 수종
상제님께서 문공신 제자의 집에서 선기옥형도수를 보실 때 황응종 제자의 집에 추수도수를 정했으며, 산하대운을걷어 돌리는 공사를 황응종 제자의 집에서 보셨다.
■생애
후손들의 전언에 의하면 인근지역 사람들을 모아서 고부관아를 습격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비교적 넉넉한 살림으로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호랑이 양반이라고 할 정도로 동네에서나 집안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무서워했다. 이마가 많이 벗겨지고 빤질빤질해서 별명을 구리쇠남박(구리로 만든 바가지같이 빛난다
상제님의 천지공사 후반기인 정미(丁未 : 37, 1907)년에 67세의 많은 나이로 상제님을 추종하기 시작했다. 문공신, 신경수, 손병욱 제자와 같은 동리에 살았으므로 상제님께서 오시면 많은 시간을 제자들의 집을 번갈아가시며 공사를 보시고 머무르고 가셨다. 부인 조씨(趙氏)와의 사이에 4남을 두었다.

증산대선생을 모셨던 부인
1)정부인 (정치순) 한쪽 발을 저는 불구의 몸으로 증산어른 모심,
2)고수부 (고판례)
3)김수부 (김말순)

증산종단 각 교단의 수부신앙

* "수부, 증산어른 부인을 으로 모시는종단
선도교, 동도법종금강도, 증산교(대법사), 오정동교단, 대한불교미륵종, 청도대향원, 증산도, 증산법종교 등이 있다.

* 수부(증산어른 부인)를 모시지 않는 종단
보천교, 선도,순천도,삼덕교,태극도,보화교,인도교, 미륵불교, 모악교, 대순진리회, 증산진법회등등 이다.

*증산도의 뿌리는 보천교(차경석)로 나왔으나 증산 어른 부인을 수부라 하여 사진을 걸고 모신다.
 

대순진경 ()